왕봉 (경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왕봉은 신나라 말기에 녹림군에 참여한 인물이다. 기근으로 인한 분쟁을 조정하다가 무리의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녹림산에서 세력을 키웠다. 신시병을 이끌고 경시제를 옹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곤양 전투에서 유수와 함께 신나라 군에 맞서 싸웠다. 경시 2년 의성왕에 봉해졌으나 이후 기록에서 사라진다.
신나라 말기에 남쪽 지역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물건을 빼앗고 다툼이 심해지자, 왕광과 함께 분쟁을 조정하였다. 그러다 사람들에 의해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수백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고, 마무, 왕상, 성단 등이 합류하였다. 왕봉의 무리는 거병하여 녹림산(綠林山)으로 숨었는데, 수개월 만에 7, 8천 명으로 수가 늘어났다. 지황 2년(21년)에는 형주목이 2만의 군사를 보내 이들 녹림군을 공격했는데, 강하군 운두(雲杜)현에서 이를 격파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경릉현을 함락시켰다. 마침내 녹림군의 수는 5만 여명에 달하였고, 주와 군의 통제 능력을 능가했다.
왕봉은 후한서 유현유분자열전에 등장한다. 칭호켄 바이안(称好軒梅庵)의 주우출판(宙出版)에서 출판한 2020년 일본 라이트 노벨 광무대제전에도 등장한다.
wikitext
2. 생애
지황 3년(22년), 역병이 들어서 반수가 죽어, 녹림군은 흩어졌다. 이때 왕광·마무·주유 등과 함께 전수군(한의 남양군)으로 들어갔다. 이쪽 녹림군의 일파를 신시병이라 한다.
용릉에서 전한의 종실 유인이 용릉병을 일으키고 녹림군과 연합하려 하자, 평림병의 지도자 진목(陳牧)과 함께 호응해 장취(長聚)를 쳤다.[2] 그러나 소장안취에서 신나라의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에게 참패하자 신시병과 평림병은 회군하려 했다. 유인은 녹림군의 다른 일파인 하강병을 끌어들였고, 결국 지황 4년(23년) 정월에 녹림 연합군은 함께 신나라 군을 무찌르고 진부와 양구사를 모두 베었다.[1] 이후 녹림군에서 황제를 추대할 때 신시병과 평림병의 장군들은 유인의 위명을 꺼려서 유약한 평림병 소속 경시장군 유현을 지지했고, 결국 유현이 황제가 됐다.[1] 왕봉은 성국상공(成國上公)에 봉해졌다.
경시 원년(23년) 3월, 녹림군의 별장으로 나중에는 후한을 세워 황제 곧 광무제가 되는 유수가 제장들을 거느리고 영천군의 곤양·정릉·언현을 함락했다. 신나라 황제 왕망은 대사도 왕심과 대사공 왕읍에게 갑사 42만 명을 포함하는 100만 군대를 파견해 5월에 이들이 영쳔에 당도했다. 녹림군의 제장들은 이 어마어마한 신나라 군대의 위세에 눌려 달아나려 했으나, 유수가 반대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장수들은 결국 유수의 계책대로 하기로 했다.[2] 그래서 왕봉은 정위대장군 왕상과 함께 성을 수비하고, 유수는 표기대장군 종조(宗佻)와 오위대장군(五威大將軍) 이일(李軼) 등과 함께 성을 나가 바깥에서 군대를 긁어오기로 했다. 유수가 포위망을 뚫고 정릉과 언현의 장군들을 불러모으는 사이, 신나라 군은 곤양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었고, 이를 견디지 못해 항복하려 했으나 왕읍이 받아주지 않았다. 6월, 유수가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신나라 군대를 무찔렀다(곤양 전투).[2]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한 경시 2년(24년) 2월, 왕봉은 의성왕(宜城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를 마지막으로, 왕봉은 사서에서 그 자취를 감춘다.
2. 1. 녹림군 초기 지도자
신나라 말기에 남쪽 지역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물건을 빼앗고 다툼이 심해지자, 왕광과 함께 분쟁을 조정하였다. 그러다 사람들에 의해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수백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고, 마무, 왕상, 성단 등이 합류하였다. 왕봉의 무리는 거병하여 녹림산(綠林山)으로 숨었는데, 수개월 만에 7, 8천 명으로 수가 늘어났다. 지황 2년(21년)에는 형주목이 2만의 군사를 보내 이들 녹림군을 공격했는데, 강하군 운두(雲杜)현에서 이를 격파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경릉현을 함락시켰다. 마침내 녹림군의 수는 5만 여명에 달하였고, 주와 군의 통제 능력을 능가했다.
지황 3년(22년), 역병이 들어서 반수가 죽어, 녹림군은 흩어졌다. 이때 왕광·마무·주유 등과 함께 전수군(한의 남양군)으로 들어갔다. 이쪽 녹림군의 일파를 신시병이라 한다.
2. 2. 신시병 결성과 경시제 옹립
지황 3년(22년), 역병으로 인해 녹림군이 흩어지자, 왕봉은 왕광, 마무, 주유 등과 함께 전수군(한의 남양군)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신시병이라 불렸다.[2]
용릉에서 전한의 종실 유인이 용릉병을 일으키고 녹림군과 연합하려 하자, 평림병의 지도자 진목(陳牧)과 함께 호응해 장취(長聚)를 쳤다.[2] 그러나 소장안취에서 신나라의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에게 참패하자 신시병과 평림병은 회군하려 했다. 유인은 녹림군의 다른 일파인 하강병을 끌어들였고, 결국 지황 4년(23년) 정월에 녹림 연합군은 함께 신나라 군을 무찌르고 진부와 양구사를 모두 베었다.[1]
이후 녹림군에서 황제를 추대할 때, 신시병과 평림병의 장군들은 유인의 위명을 꺼려서 유약한 평림병 소속 유현을 지지했고, 결국 유현이 황제가 됐다.[1] 왕봉은 성국상공(成國上公)에 봉해졌다.
경시 원년(23년) 3월, 훗날 광무제가 되는 유수가 영천군의 곤양, 정릉, 언현을 함락시켰다. 이에 신나라 황제 왕망은 대사도 왕심(王尋)과 대사공 왕읍(王邑)에게 100만 군대를 파견해 5월에 이들이 영쳔에 당도했다. 녹림군 장수들은 신나라 군대의 위세에 눌려 달아나려 했으나, 유수가 반대했고 결국 유수의 계책대로 하기로 했다. 왕봉은 정위대장군 왕상과 함께 성을 수비하고, 유수는 성을 나가 군대를 긁어오기로 했다. 유수가 포위망을 뚫고 구원군을 이끄는 사이, 신나라 군은 곤양성을 공격했고, 왕봉 등은 항복하려 했으나 왕읍이 받아주지 않았다. 경시 원년(23년) 6월, 유수가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신나라 군대를 무찔렀다(곤양 전투).[2]
경시 2년(24년) 2월,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이성제후왕을 봉할 때 왕봉은 의성왕(宜城王)에 봉해졌다.
2. 3. 곤양 전투와 경시제 정권
신나라 말기에 남쪽 지역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물건을 빼앗고 다툼이 심해지자, 왕광과 함께 분쟁을 조정하였다. 그러더니 사람들에 의해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수백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고, 마무, 왕상, 성단 등이 합류하였다. 왕봉의 무리는 거병하여 녹림산(綠林山)으로 숨었는데, 수개월 만에 7, 8천 명으로 수가 늘어났다. 지황 2년(21년)에는 형주목이 2만의 군사를 보내 이들 녹림군을 공격했는데, 강하군 운두(雲杜)현에서 이를 격파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경릉현을 함락시켰다. 마침내 녹림군의 수는 5만 여명에 달하였고, 주와 군의 통제 능력을 능가했다.
지황 3년(22년), 역병이 들어서 반수가 죽어, 녹림군은 흩어졌다. 이때 왕광·마무·주유 등과 함께 전수군(한의 남양군)으로 들어갔다. 이쪽 녹림군의 일파를 신시병이라 한다.
용릉에서 전한의 종실 유인이 용릉병을 일으키고 녹림군과 연합하려 하자, 평림병의 지도자 진목(陳牧)과 함께 호응해 장취(長聚)를 쳤다.[2] 그러나 소장안취에서 신나라의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에게 참패하자 신시병과 평림병은 회군하려 했다. 유인은 녹림군의 다른 일파인 하강병을 끌어들였고, 결국 지황 4년(23년) 정월에 녹림 연합군은 함께 신나라 군을 무찌르고 진부와 양구사를 모두 베었다. 이후 녹림군에서 황제를 추대할 때 신시병과 평림병의 장군들은 유인의 위명을 꺼려서 유약한 평림병 소속 경시장군 유현을 지지했고, 결국 유현이 황제가 됐다.[1] 왕봉은 성국상공(成國上公)에 봉해졌다.
경시 원년(23년) 3월, 녹림군의 별장으로 나중에는 후한을 세워 황제 곧 광무제가 되는 유수가 제장들을 거느리고 영천군의 곤양·정릉·언현을 함락했다. 신나라 황제 왕망은 대사도 왕심과 대사공 왕읍에게 갑사 42만 명을 포함하는 100만 군대를 파견해 5월에 이들이 영쳔에 당도했다. 녹림군의 제장들은 이 어마어마한 신나라 군대의 위세에 눌려 달아나려 했으나, 유수가 반대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장수들은 결국 유수의 계책대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왕봉은 정위대장군 왕상과 함께 성을 수비하고, 유수는 표기대장군 종조(宗佻)와 오위대장군(五威大將軍) 이일(李軼) 등과 함께 성을 나가 바깥에서 군대를 긁어오기로 했다. 유수가 포위망을 뚫고 정릉과 언현의 장군들을 불러모으는 사이, 신나라 군은 곤양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었고, 이를 견디지 못해 항복하려 했으나 왕읍이 받아주지 않았다. 6월, 유수가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신나라 군대를 무찔렀다(곤양 전투).[2]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한 경시 2년(24년) 2월, 왕봉은 의성왕(宜城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를 마지막으로, 왕봉은 사서에서 그 자취를 감춘다.
3. 평가
4. 등장 작품
5.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후한서 권14 종실삼왕사후열전 중 제무왕
[2]
서적
후한서 권1 상 광무제기제1 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